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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히데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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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쿠가와 히데타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셋째 아들로, 에도 막부의 2대 쇼군이다. 그는 아버지 이에야스가 세운 막부의 기틀을 다지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활약했으나, 우에다 성 공격 지연으로 세키가하라 본 전투에 늦게 합류하여 아버지의 질책을 받기도 했다. 1605년 쇼군에 취임하여 이원 정치 체제를 구축하고, 오사카 전투를 통해 도요토미 가문을 멸망시켰다. 그는 쇄국 정책을 추진하고, 무가제법도금중병공가제법도를 제정하여 막부의 통치 기반을 강화했다. 1623년 장남 도쿠가와 이에미쓰에게 쇼군직을 물려주고 은퇴한 후에도 정국에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1632년 5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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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히데타다
기본 정보
이름도쿠가와 히데타다
원어 이름徳川 秀忠
로마자 표기Tokugawa Hidetada
출생일1579년 5월 2일
출생지하마마쓰, 시즈오카현, 도쿠가와 씨
사망일1632년 3월 14일
사망지에도, 도쿠가와 막부 (현재의 도쿄, 일본)
묘소다이토쿠인 영묘
법명다이토쿠인덴 고렌샤 도쿠요 뉴사이 다이코지 ()
가문도쿠가와 씨
소속도쿠가와 씨
동군
조정
도쿠가와 막부
참여 전투우에다 성 전투
오사카 전투
도쿠가와 히데타다
도쿠가와 히데타다
관직
관위종5위하 시종
구라우도노토
정5위하
무사시노카미
종4위하
정4위하
우근위소장
참의
우근위중장
종3위 곤츄나곤
곤다이나곤
종2위
우근위대장
정2위 내대신
정이대장군
종1위 우대신
태정대신
정1위
막부에도 막부 제2대 쇼군 (재임: 1605년 - 1623년)
가족 관계
아버지도쿠가와 이에야스
어머니사이고노쓰보네
양어머니아차노쓰보네
배우자오히메
오에요
자녀센히메
타마히메
가쓰히메
하쓰히메
초마루 (1601–1602)
도쿠가와 이에미쓰
도쿠가와 다다나가
도쿠가와 마사코
호시나 마사유키
기타
기타 정보
재임 기간1605년 6월 2일 - 1623년 8월 23일
군주고요제이 천황
고미즈노오 천황
이전 쇼군도쿠가와 이에야스
다음 쇼군도쿠가와 이에미쓰
도쿠가와 히데타다 서명
도쿠가와 히데타다 서명
개명나가마쓰 (나가마루)
다케치요 (유년기 이름)
히데타다
별칭에도 주나곤
에도 우다이쇼
소코쿠사마

2. 생애

덴쇼 7년(1579년 5월 31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3남으로 도토미국 하마마쓰에서 태어났다.[54] 생모는 이에야스의 측실 사이고노 쓰보네이다. 사이고노 쓰보네의 친정인 사이고 씨는 규슈 기쿠치 씨의 일족으로, 무로마치 시대 초기에는 도쿠가와 가문의 본거지인 미카와슈고다이이기도 했던 명문가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는 히데타다가 태어나기 전 이미 적장자인 마쓰다이라 노부야스와 차남 오기마루(於義丸) 두 아들이 있었으나, 히데타다가 태어난 해 마쓰다이라 노부야스가 사망하고, 오기마루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로 보내졌다가 유키 씨의 후사를 이으면서, 명문 혈족이자 순서상으로도 장남이 된 히데타다가 사실상 이에야스의 후계자로서 대우받게 되었다. 유모는 오오바노 쓰보네이며, 아명은 '''나가마쓰'''(長松), '''다케치요'''(竹千代)이다.

덴쇼 18년(1590년) 오다와라 정벌 즈음에 사실상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인질로써 교토에 상경하여 관례를 치른 뒤 오다 노부카쓰의 딸이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녀인 오히메(小姫)와 혼인하였다. 그러나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오다 노부카쓰 사이가 틀어지면서 이혼하였다. 이후 주나곤에 서임되어 에도노 주나곤(江戸中納言)으로 불렸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하시바 성씨가 주어졌다.[16] 분로쿠 4년(1595년)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또 다른 양녀이자 오다 노부나가의 조카딸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애첩 요도의 여동생 고우(江, 에요)와 재혼하였다.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가 발발하자 히데타다는 도카이도를 지나는 이에야스 본대와 더불어 나카센도를 지나는 별동대를 인솔하는 직책을 맡았다. 그러나 날씨 변화로 인한 명령 지연과 행군 속도 저하, 시나노국 우에다 성 공격 지연 등으로 시간을 허비한 히데타다의 군대는 결국 9월 15일의 세키가하라 본 전투에 합류하는 데 실패하고 9월 20일에야 오쓰의 본진에 도착하였다.[54] 이 때 히데타다는 승리를 축하하고 시간을 지체한 것에 대한 변명을 하기 위해 즉각 부친 이에야스를 만나고자 하였으나 이에야스는 「속이 시원치 않다(気分がすぐれない)」는 말과 함께 아들의 면회 요청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다음날 또는 3일 뒤 이에야스는 결국 면담을 허용하였다고 한다.

게이초 8년(1603년) 2월 29일,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세이이 다이쇼군에 취임하여 에도 바쿠후를 열었다. 이에야스는 도쿠가와 씨의 쇼군 세습을 확실히 하기 위해 히데타다에게 우코노에곤다이쇼(右近衛大将) 관직을 내려줄 것을 조정에 요청했고, 같은 해 4월 16일 허락을 받아 히데타다는 에도노 우다이쇼(江戸右大将)라는 별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로써 히데타다의 도쿠가와 가문 상속과 도쿠가와 가문의 쇼군직 세습이 확고해졌으며, 이후 쇼군가에서 '''우다이쇼'''(右大将)는 쇼군 후계자를 가리키는 호칭으로 굳어졌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도요토미 가문의 위세를 꺾고 도카이, 간토 등을 완전히 제압한 도쿠가와 가문은 간토의 독립 정권을 수립하였다.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고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명목상의 통치자가 된 후, 섭정들은 권력 다툼을 벌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5명의 섭정 중 가장 강력한 인물 중 한 명이었고, 자신을 중심으로 동군(東軍)을 결집하기 시작했다. 서군(西軍)은 이시다 미쓰나리를 중심으로 결집했다. 두 세력은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충돌했고, 이에야스가 결정적으로 승리하여 도쿠가와 막부의 기반을 마련했다.

히데타다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아버지 이에야스의 명령으로 우에스기 씨를 시나노 국에서 억제하는 작전을 수행했다. 그러나 사나다 마사유키가 히데타다의 군대를 묶어 두는 데 성공하여, 히데타다는 아버지의 결정적인 승리를 돕기에는 너무 늦게 도착했다. 『렬조성적』에는 "우리 군이 크게 패하여 사상자를 헤아릴 수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히데타다 군은 대패했다. 이에야스는 히데타다에게 분노했고, 참모들의 설득으로 간신히 아들을 처벌하지 않기로 했다.

도쿠가와 히데타다상 (도쿠가와 기념재단 소장)


1601년 12월 3일, 히데타다의 첫째 아들인 초마루(長丸)가 태어났으나, 1602년 9월 병으로 사망했다. 1603년 고요제이 천황(後陽成天皇)은 이에야스에게 쇼군(将軍) 칭호를 부여했고, 히데타다는 쇼군직의 상속자가 되었다.

1605년 정월, 이에야스는 에도를 떠나 후시미성으로 들어갔다. 2월, 히데타다는 16만 명의 상락군을 이끌고 출발했다. 3월 21일, 히데타다도 후시미성에 들어갔다. 4월 7일, 이에야스는 쇼군직 사임과 후임으로 히데타다를 천황에게 추천했고, 4월 16일, 히데타다는 제2대 쇼군에 임명되었다. 이에 따라 이에야스는 대어소라 불리게 되었고, 히데타다가 도쿠가와 가문의 당주가 되었다. 히데타다는 에도성에 거주하고, 순부성에 사는 대어소 이에야스와 이원정치 체제를 이루었지만, 혼다 마사노부 등의 보좌에 힘입어 이에야스의 뜻을 따른 정치를 행했다. 주로 히데타다는 도쿠가와가 직할령과 푸대 명문을 통치하고, 이에야스는 외양 대명과의 교섭을 담당했다.

쇼군 취임으로 무가의 장이 된 히데타다는 자신의 군사력 증강을 실시했다. 히데타다는 쇼군 취임과 같은 해인 1605년에 친위대로서 서원번을, 이듬해 소성조를 창설하여 자신과 직결되는 군사력을 강화했다. 1610년 윤2월에는 미카와 국다하라에서 대규모 권수를 실시하여 쇼군인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고 군사 훈련을 했다. 1611년에는 도요토미를 제외한 대명으로부터 서약서를 징수했다.

1612년, 히데타다는 이에야스가 가장 아끼던 손녀인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결혼을 주선했다. 그러나 이것으로 히데요리의 음모를 진압하지 못하자, 오사카 전투가 발발했다. 1614년부터 1615년까지 벌어진 오사카 전투에서 히데타다는 아버지와 함께 오사카의 도요토미 세력을 진압했다. 오사카 여름의 진 직전에 행해진 군례에서는 이에야스와 히데타다 모두 선봉을 주장했으나, 결국 히데타다가 선봉을 맡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쇼군직을 히데타다에게 물려준 후, 히데타다는 에도 성, 이에야스는 슨푸 성에 거주하며 이원 정치 체제가 설립되었다.[3] 그러나 이에야스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실권은 그에게 있었고, 히데타다는 혼다 마사노부 등의 보좌를 받으며 이에야스를 보필했다.[3] 히데타다는 도쿠가와 직할령 및 후다이 다이묘(譜代大名)들을 관리했다.

게이초 19년(1614년) 오사카 전투가 발발하여 히데타다는 이에야스와 함께 참전하여 총대장으로 추대되었다.[4] 1614년부터 1615년까지 벌어진 이 전투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전략에 대해 의견이 달랐다.[4] 1615년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는 오노 하루후사(大野治房)에게 본진을 위협받기도 하였다. 이 전쟁으로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그의 생모 요도가 자결하면서 도요토미 가문은 멸망했다.

에도 성의 천수각.
히데타다 이후로 에도 성은 도쿠가와 쇼군가가 주로 머무르는 본성이 되었다.


이후 이에야스와 히데타다는 부케쇼핫토(武家諸法度), 금중병공가제법도(禁中並公家諸法度) 등을 제정하였다.

일설에 따르면 히데타다는 쇼군 지위는 물려받았으나 겐지장자[55](源氏長者), 쇼가쿠인(奨学院) 별당은 받지 못했다는 설이 있다. 『도쿠가와 실기(徳川実紀)』에는 받았다고 되어 있으나, 이는 사후의 추증이라는 것이다.[56]

겐나 2년(1616년) 이에야스가 사망하면서 히데타다는 정국의 실권을 쥐었다.[4] 사카이 다다요, 도이 도시카쓰 등 자신의 최측근 인사들을 로주(老中)에 임명하고,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 다수의 도자마 다이묘들을 개역하였다. 고산케를 구성하는 세 남동생들에게 각각 오와리, 기이, 미토를 영지로 내리고 차남 다다나가에게는 스루가, 도토미, 가이를 주었다. 마쓰다이라 다다테루, 마쓰다이라 다다나오, 혼다 마사즈미 등 가까운 인물들 역시 개역한 뒤 귀양보내는 등 엄격한 면모를 보였다. 조정에 대해서도 단호한 태도를 취하며 마사코고미즈노오 천황의 황후로 입궁시켰다. 외교적으로는 쇄국 정책을 추구하여 외국 선박의 기항을 히라도섬(平戸), 나가사키(長崎) 등으로 한정하였다.[5]

히데타다의 명으로 실행된 교토의 대순교에서, 기리시탄 처형의 땅에 세워진 비석


겐나 9년(1623년) 쇼군의 지위를 적장자인 도쿠가와 이에미쓰에게 물려주고 오고쇼로 물러났으나, 부친 이에야스가 그랬듯이 실권을 장악하고 정치에 관여하였다.[6] 오고쇼로 물러난 초기에는 이에야스가 슨푸성으로 거처를 옮겼던 것처럼 오다와라성으로 거처를 옮길 것을 고려했으나, 결국 에도성 니시노 마루(西の丸, 현 천황 일족이 거주하는 교코)에서 정사를 보살폈다.

간에이 6년(1629년) 시에 사건[57]이 발생하면서 조정, 신사 및 사원에 대한 통제를 한층 강화하였다. 그는 기독교 서적을 금지하고, 기독교 다이묘들의 자살을 강요했으며, 다른 기독교인들에게 사형의 위협 아래 배교를 명령했다. 그리고 1628년 나가사키에서 기독교를 버리거나 숨지 않겠다고 거부한 55명의 기독교인(일본인과 외국인 모두)을 자녀들과 함께 불태워 처형했다. 이듬해인 간에이 7년(1630년) 9월 12일 외손녀 이치노미야(一宮)가 메이쇼 천황으로 황위에 오르면서 천황의 외조부가 되었다.

간에이 8년(1631년), 차남 도쿠가와 다다나가의 영지를 몰수하고 칩거를 명령하였으나, 이후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1629년경부터 왼쪽 유방 피부 사이에 혹이 생기는 등 병의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고, 1631년에는 가슴 혹이 재발하여 격렬한 통증에 시달렸다. 약물 치료와 뜸, 침 치료 등을 받았지만, 증세는 호전되지 않았다. 1631년 7월에는 사나다무시(촌충)에 의한 질병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1632년 정월 1일, 병중에도 여러 다이묘들과 신년 인사를 나누었으나, 이것이 히데타다의 마지막 정치 활동이었다. 1월 20일에는 약을 거부할 정도로 위독해졌고, 결국 간에이 9년(1632년) 1월 24일 亥刻(오후 10시경)에 훙거(薨去). 향년 54세.[6]

이에미쓰에게 “당가의 밤을 지새우는 날이 짧고, 지금까지 건설해 온 綱紀政令(강기정령)이 아직 완비되지 않았으므로, 근년 안에 각각 개수하고자 생각했으나, 지금은 불행하게도 그 일도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나의 뒤를 이어, 그대가 약간 거리낌 없이 개정한다면, 이것이야말로 나의 뜻을 잇는 효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불교식 시호는 다이토쿠인/台徳院일본어이다.[7] 그의 유골은 에도의 다이토쿠인 묘소에 안치되었다.[26] 묘소는 도쿄도 미나토구 한쪽에 있던 다이토쿠인 영묘였으나, 전쟁으로 소실되어 쇼와 33년(1958년)에 조조지 본당 근처로 이전 및 개축되었다. 이때 히데타다의 유해도 기리가야 화장장에서 화장되어 개장되었으며, 유체 조사 결과 혈액형은 O형, 키는 157.6cm였다.

도쿄도 미나토구 시바코엔의 죠죠지에 있는 히데타다와 그의 부인의 보탑(2019년 11월 4일 촬영)

2. 1. 유년기 및 가문 상속

도쿠가와 히데타다는 덴쇼 7년(1579년 5월 31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3남으로 도토미국 하마마쓰에서 태어났다.[54] 생모는 이에야스의 측실 사이고노 쓰보네이다. 사이고노 쓰보네의 친정인 사이고 씨는 규슈 기쿠치 씨의 일족으로, 무로마치 시대 초기에는 도쿠가와 가문의 본거지인 미카와슈고다이이기도 했던 명문가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는 히데타다가 태어나기 전 이미 적장자인 마쓰다이라 노부야스와 차남 오기마루(於義丸) 두 아들이 있었으나, 히데타다가 태어난 해 마쓰다이라 노부야스가 사망하고, 오기마루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로 보내졌다가 유키 씨의 후사를 이으면서, 명문 혈족이자 순서상으로도 장남이 된 히데타다가 사실상 이에야스의 후계자로서 대우받게 되었다. 유모는 오오바노 쓰보네이며, 아명은 '''나가마쓰'''(長松), '''다케치요'''(竹千代)이다.

덴쇼 18년(1590년) 오다와라 정벌 즈음에 사실상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인질로써 교토에 상경하여 관례를 치른 뒤 오다 노부카쓰의 딸이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녀인 오히메(小姫)와 혼인하였다. 그러나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오다 노부카쓰 사이가 틀어지면서 이혼하였다. 이후 주나곤에 서임되어 에도노 주나곤(江戸中納言)으로 불렸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하시바 성씨가 주어졌다.[16] 분로쿠 4년(1595년)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또 다른 양녀이자 오다 노부나가의 조카딸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애첩 요도의 여동생 고우(江, 에요)와 재혼하였다.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가 발발하자 히데타다는 도카이도를 지나는 이에야스 본대와 더불어 나카센도를 지나는 별동대를 인솔하는 직책을 맡았다. 그러나 날씨 변화로 인한 명령 지연과 행군 속도 저하, 시나노국 우에다 성 공격 지연 등으로 시간을 허비한 히데타다의 군대는 결국 9월 15일의 세키가하라 본 전투에 합류하는 데 실패하고 9월 20일에야 오쓰의 본진에 도착하였다.[54] 이 때 히데타다는 승리를 축하하고 시간을 지체한 것에 대한 변명을 하기 위해 즉각 부친 이에야스를 만나고자 하였으나 이에야스는 「속이 시원치 않다(気分がすぐれない)」는 말과 함께 아들의 면회 요청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다음날 또는 3일 뒤 이에야스는 결국 면담을 허용하였다고 한다.

2. 2. 세키가하라 전투와 쇼군 취임

게이초 8년(1603년) 2월 29일,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세이이 다이쇼군에 취임하여 에도 바쿠후를 열었다. 이에야스는 도쿠가와 씨의 쇼군 세습을 확실히 하기 위해 히데타다에게 우코노에곤다이쇼(右近衛大将) 관직을 내려줄 것을 조정에 요청했고, 같은 해 4월 16일 허락을 받아 히데타다는 에도노 우다이쇼(江戸右大将)라는 별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로써 히데타다의 도쿠가와 가문 상속과 도쿠가와 가문의 쇼군직 세습이 확고해졌으며, 이후 쇼군가에서 '''우다이쇼'''(右大将)는 쇼군 후계자를 가리키는 호칭으로 굳어졌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도요토미 가문의 위세를 꺾고 도카이, 간토 등을 완전히 제압한 도쿠가와 가문은 간토의 독립 정권을 수립하였다.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고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명목상의 통치자가 된 후, 섭정들은 권력 다툼을 벌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5명의 섭정 중 가장 강력한 인물 중 한 명이었고, 자신을 중심으로 동군(東軍)을 결집하기 시작했다. 서군(西軍)은 이시다 미쓰나리를 중심으로 결집했다. 두 세력은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충돌했고, 이에야스가 결정적으로 승리하여 도쿠가와 막부의 기반을 마련했다.

히데타다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아버지 이에야스의 명령으로 우에스기 씨를 시나노 국에서 억제하는 작전을 수행했다. 그러나 사나다 마사유키가 히데타다의 군대를 묶어 두는 데 성공하여, 히데타다는 아버지의 결정적인 승리를 돕기에는 너무 늦게 도착했다. 『렬조성적』에는 "우리 군이 크게 패하여 사상자를 헤아릴 수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히데타다 군은 대패했다. 이에야스는 히데타다에게 분노했고, 참모들의 설득으로 간신히 아들을 처벌하지 않기로 했다.

1601년 12월 3일, 히데타다의 첫째 아들인 초마루(長丸)가 태어났으나, 1602년 9월 병으로 사망했다. 1603년 고요제이 천황(後陽成天皇)은 이에야스에게 쇼군(将軍) 칭호를 부여했고, 히데타다는 쇼군직의 상속자가 되었다.

1605년 정월, 이에야스는 에도를 떠나 후시미성으로 들어갔다. 2월, 히데타다는 16만 명의 상락군을 이끌고 출발했다. 3월 21일, 히데타다도 후시미성에 들어갔다. 4월 7일, 이에야스는 쇼군직 사임과 후임으로 히데타다를 천황에게 추천했고, 4월 16일, 히데타다는 제2대 쇼군에 임명되었다. 이에 따라 이에야스는 대어소라 불리게 되었고, 히데타다가 도쿠가와 가문의 당주가 되었다. 히데타다는 에도성에 거주하고, 순부성에 사는 대어소 이에야스와 이원정치 체제를 이루었지만, 혼다 마사노부 등의 보좌에 힘입어 이에야스의 뜻을 따른 정치를 행했다. 주로 히데타다는 도쿠가와가 직할령과 푸대 명문을 통치하고, 이에야스는 외양 대명과의 교섭을 담당했다.

쇼군 취임으로 무가의 장이 된 히데타다는 자신의 군사력 증강을 실시했다. 히데타다는 쇼군 취임과 같은 해인 1605년에 친위대로서 서원번을, 이듬해 소성조를 창설하여 자신과 직결되는 군사력을 강화했다. 1610년 윤2월에는 미카와 국다하라에서 대규모 권수를 실시하여 쇼군인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고 군사 훈련을 했다. 1611년에는 도요토미를 제외한 대명으로부터 서약서를 징수했다.

1612년, 히데타다는 이에야스가 가장 아끼던 손녀인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결혼을 주선했다. 그러나 이것으로 히데요리의 음모를 진압하지 못하자, 오사카 전투가 발발했다. 1614년부터 1615년까지 벌어진 오사카 전투에서 히데타다는 아버지와 함께 오사카의 도요토미 세력을 진압했다. 오사카 여름의 진 직전에 행해진 군례에서는 이에야스와 히데타다 모두 선봉을 주장했으나, 결국 히데타다가 선봉을 맡았다.

2. 3. 이원 정치와 친정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쇼군직을 히데타다에게 물려준 후, 히데타다는 에도 성, 이에야스는 슨푸 성에 거주하며 이원 정치 체제가 설립되었다.[3] 그러나 이에야스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실권은 그에게 있었고, 히데타다는 혼다 마사노부 등의 보좌를 받으며 이에야스를 보필했다.[3] 히데타다는 도쿠가와 직할령 및 후다이 다이묘(譜代大名)들을 관리했다.

게이초 19년(1614년) 오사카 전투가 발발하여 히데타다는 이에야스와 함께 참전하여 총대장으로 추대되었다.[4] 1614년부터 1615년까지 벌어진 이 전투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전략에 대해 의견이 달랐다.[4] 1615년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는 오노 하루후사(大野治房)에게 본진을 위협받기도 하였다. 이 전쟁으로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그의 생모 요도가 자결하면서 도요토미 가문은 멸망했다.

이후 이에야스와 히데타다는 부케쇼핫토(武家諸法度), 금중병공가제법도(禁中並公家諸法度) 등을 제정하였다.

일설에 따르면 히데타다는 쇼군 지위는 물려받았으나 겐지장자[55](源氏長者), 쇼가쿠인(奨学院) 별당은 받지 못했다는 설이 있다. 『도쿠가와 실기(徳川実紀)』에는 받았다고 되어 있으나, 이는 사후의 추증이라는 것이다.[56]

겐나 2년(1616년) 이에야스가 사망하면서 히데타다는 정국의 실권을 쥐었다.[4] 사카이 다다요, 도이 도시카쓰 등 자신의 최측근 인사들을 로주(老中)에 임명하고,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 다수의 도자마 다이묘들을 개역하였다. 고산케를 구성하는 세 남동생들에게 각각 오와리, 기이, 미토를 영지로 내리고 차남 다다나가에게는 스루가, 도토미, 가이를 주었다. 마쓰다이라 다다테루, 마쓰다이라 다다나오, 혼다 마사즈미 등 가까운 인물들 역시 개역한 뒤 귀양보내는 등 엄격한 면모를 보였다. 조정에 대해서도 단호한 태도를 취하며 마사코고미즈노오 천황의 황후로 입궁시켰다. 외교적으로는 쇄국 정책을 추구하여 외국 선박의 기항을 히라도섬(平戸), 나가사키(長崎) 등으로 한정하였다.[5]

2. 4. 은거와 사망

겐나 9년(1623년) 쇼군의 지위를 적장자인 도쿠가와 이에미쓰에게 물려주고 오고쇼로 물러났으나, 부친 이에야스가 그랬듯이 실권을 장악하고 정치에 관여하였다.[6] 오고쇼로 물러난 초기에는 이에야스가 슨푸성으로 거처를 옮겼던 것처럼 오다와라성으로 거처를 옮길 것을 고려했으나, 결국 에도성 니시노 마루(西の丸, 현 천황 일족이 거주하는 교코)에서 정사를 보살폈다.

간에이 6년(1629년) 시에 사건[57]이 발생하면서 조정, 신사 및 사원에 대한 통제를 한층 강화하였다. 그는 기독교 서적을 금지하고, 기독교 다이묘들의 자살을 강요했으며, 다른 기독교인들에게 사형의 위협 아래 배교를 명령했다. 그리고 1628년 나가사키에서 기독교를 버리거나 숨지 않겠다고 거부한 55명의 기독교인(일본인과 외국인 모두)을 자녀들과 함께 불태워 처형했다. 이듬해인 간에이 7년(1630년) 9월 12일 외손녀 이치노미야(一宮)가 메이쇼 천황으로 황위에 오르면서 천황의 외조부가 되었다.

간에이 8년(1631년), 차남 도쿠가와 다다나가의 영지를 몰수하고 칩거를 명령하였으나, 이후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1629년경부터 왼쪽 유방 피부 사이에 혹이 생기는 등 병의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고, 1631년에는 가슴 혹이 재발하여 격렬한 통증에 시달렸다. 약물 치료와 뜸, 침 치료 등을 받았지만, 증세는 호전되지 않았다. 1631년 7월에는 사나다무시(촌충)에 의한 질병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1632년 정월 1일, 병중에도 여러 다이묘들과 신년 인사를 나누었으나, 이것이 히데타다의 마지막 정치 활동이었다. 1월 20일에는 약을 거부할 정도로 위독해졌고, 결국 간에이 9년(1632년) 1월 24일 亥刻(오후 10시경)에 훙거(薨去). 향년 54세.[6]

이에미쓰에게 “당가의 밤을 지새우는 날이 짧고, 지금까지 건설해 온 綱紀政令(강기정령)이 아직 완비되지 않았으므로, 근년 안에 각각 개수하고자 생각했으나, 지금은 불행하게도 그 일도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나의 뒤를 이어, 그대가 약간 거리낌 없이 개정한다면, 이것이야말로 나의 뜻을 잇는 효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불교식 시호는 다이토쿠인/台徳院일본어이다.[7] 그의 유골은 에도의 다이토쿠인 묘소에 안치되었다.[26] 묘소는 도쿄도 미나토구 한쪽에 있던 다이토쿠인 영묘였으나, 전쟁으로 소실되어 쇼와 33년(1958년)에 조조지 본당 근처로 이전 및 개축되었다. 이때 히데타다의 유해도 기리가야 화장장에서 화장되어 개장되었으며, 유체 조사 결과 혈액형은 O형, 키는 157.6cm였다.

3. 정책

3. 1. 무가제법도와 금중병공가제법도

3. 2. 쇄국 정책

4. 가족 관계

도쿠가와 히데타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3남으로, 어머니는 사이고노츠보네이다. 부친 이에야스는 마쓰다이라 히로타다와 오다이노카타의 아들이며, 모친 사이고노츠보네는 도즈카 타다하루와 사이고 마사카쓰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히데타다는 아시카가씨의 방계 기라씨의 혈통을 일부 잇고 있다.

정실은 오히메였으나 혼인 전에 사망했고, 이후 (江)와 재혼했다. 스겐인은 아자이 나가마사오이치의 딸이다. 스겐인과의 사이에서 센히메, 다마히메, 가쓰히메, 하쓰히메, 도쿠가와 이에미쓰, 도쿠가와 다다나가, 가즈코 / 마사코를 낳았다.

측실 오시즈노가타에게서는 서자 호시나 마사유키를 얻었다. 호시나 마사유키는 아이즈번의 번주가 되었다. 또 다른 측실에게서는 장남 조마루를 얻었으나 요절했다.

장녀 센히메도요토미 히데요리와 혼인했다가 이후 혼다 다다토키와 재혼했다. 차녀 다마히메는 가가번마에다 도시쓰네와 혼인하여 마에다 미쓰타카를 낳았다. 3녀 가쓰히메는 후쿠이번의 마쓰다이라 다다나오와, 4녀 하쓰히메는 교고쿠 다다타카와 혼인했다. 차남 도쿠가와 이에미쓰는 에도 막부 제3대 쇼군이 되었고, 3남 도쿠가와 다다나가는 스루가 번의 번주가 되었다. 5녀 도쿠가와 마사코고미즈노오 천황의 황후가 되어 메이쇼 천황을 낳았다.

히데타다는 여러 양자를 두었는데, 유키 히데야스의 딸 키사히메, 오가사와라 히데마사의 딸 치요히메, 오쿠히라 이에마사의 딸 빈히메, 이케다 테루마사의 딸 차차히메와 후루히메, 마쓰다이라 타다나오의 딸 가메히메, 혼다 타다토키의 딸 가쓰히메, 다테 타다무네의 딸 나베히메, 사카키바라 야스마사의 딸 쓰루히메, 마쓰다이라 타다요시의 딸 히사히메, 가부시게 히데유키의 딸 스코호인, 도요토미 히데카쓰의 딸 칸시, 혼다 타다카쓰의 딸 고마쓰히메 등이 있다.

히데타다의 손자로는 도쿠가와 이에쓰나, 도쿠가와 쓰나시게, 도쿠가와 쓰나요시 등이 있으며, 증손자로는 도쿠가와 이에노부, 마쓰다이라 키요타케, 현손으로는 도쿠가와 이에쓰기가 있다.

5. 평가

도쿠가와 히데타다에 대한 평가는 사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徳川実紀』에서는 히데타다를 인자하고 효성스러우며 공손한 인물로 묘사하며, 유교적 관점에서 최고의 칭찬을 하고 있다. 그러나 막부 자체에서 편찬한 역사서임에도 불구하고 히데타다의 무장으로서의 평가는 낮게 나타난다.

이에야스는 히데타다를 "수성의 시대"에 적합한 군주로 판단하여 후계자로 삼았다고 여겨진다. 이에야스는 唐의 太宗의 치세를 기록한 『貞観政要』를 읽고 "수성은 창업보다 어렵다"라는 구절에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히데타다는 아버지의 노선을 충실히 따르며 공가제법도, 무가제법도 등의 법을 정비·확립하여 에도 막부의 기초를 다지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야마모토 히로후미는 “가정의 노선을 확립한 것은 히데타다의 공적이다. 정치적 자질에 있어서는 가미츠나보다 훨씬 뛰어났다”고 평가했다.[31] 딸인 가즈코를 고미즈노오 천황에게 시집보내 황실을 견제하고, 자의사건을 통해 사찰 세력을 처단하는 등 무가 정권의 기초를 확립하는 데 힘썼다.

가미츠나에게 쇼군직을 물려준 후에도 대어소로서 정무를 전면적으로 담당하였다. 작가 우미오토지 시오고로는 “가정은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했다. 히데타다는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절반은 스스로 결정했다. 가미츠나는 모든 것을 중신에게 맡겼다.”라고 평했다.

히데타다는 침착하고 신중한 성격의 소유자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오사카 전투 이후, 노(能)를 관람하던 중 경미한 지진이 발생했을 때 "흔들림은 심하지만 벽이나 지붕이 무너질 징후는 없으니,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안전하다"라고 지시했다.[33] 또한 13세 때 유학 강의를 듣던 중 소가 난입하는 소란 속에서도 침착하게 강의를 계속 들었다고 한다.[33]

히데타다는 뱀장어를 잡으면 신벌을 받는다는 미시마 타이샤(미시마 명신)의 연못에서 뱀장어를 잡은 소자를 십자가형에 처하며 "신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언젠가 국법도 경시하여 범할 것이다"라고 말한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엄격한 통치 방식을 보여주기도 했다.

호소카와 타다오키가 아들 타다토시에게 호소카와 유사이로부터 물려받은 칼 '오오미하라'를 주지 않자, 히데타다가 아사쿠사가와에서 수욕을 하는 틈을 타 오오미하라를 빼앗아 타다토시에게 하사했다는 일화도 있다.[35]

히데타다는 다도를 후루타 오리베에게 배우고 특히 애호한 다인(茶人)이기도 했다.

뼈 등으로 추정되는 히데타다의 체격은 키가 약 158cm 정도였고,[34] 털이 많은 팔다리를 가진 체격이었다. 사인은 위암 등의 소화기암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후세에는 무서운 아내를 둔 사람으로 측실을 두고 싶어도 아내가 무서워서 둘 수 없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40] 그러나 도쿠가와 정권이 다이묘 통제의 필요성으로 인해 일부일처제를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쇼군이 그것을 어길 수 없었다는 다른 설도 있다.[4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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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웹사이트 大河ドラマ 第50 作 江(ごう) 姫たちの戦国 http://www.nhk.or.jp[...] 2009-07-11
[3] 서적 Annales des empereurs du Japon 1834
[4] 서적
[5] 웹사이트 『家康の誤算』磯田道史著 「徳川政権消滅事故」を調査する https://www.sankei.c[...] Sankei Shinbun 2023-06-24
[6] 서적 Secret Memoirs of the Shoguns: Isaac Titsingh and Japan, 1779–1822
[7] 서적 Secret Memoirs of the Shoguns: Isaac Titsingh and Japan, 1779–1822 f1aQAgAAQBAJ
[8] 웹사이트 Genealogy https://reichsarchiv[...] 2010-05-06
[9] 백과사전 2022-09-28
[10] 서적 家康の正妻 築山殿 悲劇の生涯をたどる 平凡社新書 2022
[11] 서적 豊臣政権の対北条政策と家康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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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문서 (天正17年)九月十七日付家康書状
[14] 문서 家忠日記 1580-01-25
[15] 문서 賜姓は1597年説もあり
[16] 논문 羽柴氏下賜と豊臣姓下賜 1996
[17] 문서 家康子於長公家成、予所よりしやうそくニあらためられ候
[18] 문서 秀忠から見て5代前の祖先である松平長忠、高祖父(4代前の祖先)である松平信忠、祖父の松平広忠がいずれも「忠」を用いている。
[19] 서적 羽柴(豊臣)政権における家康の地位 戒光祥出版 2023-05
[20] 논문 書評 福田千鶴著『淀殿 -われ太閤の妻となりて-』 織豊期研究会 2007
[21] 문서 達子は近江国の戦国大名浅井長政の三女で、母は織田信長の妹お市の方。達子は天正14年から文禄元年頃に秀吉の養子・豊臣秀勝に嫁いでいたが、文禄元年に秀勝は死去していた。
[22] 논문 天正・文禄・慶長期、武家叙任と豊臣姓下賜の事例 2013
[23] 서적 源氏と日本国王 講談社 2003
[24] 서적 京都地名の由来を歩く 2015
[25] 논문 京都の大殉教の殉教地について
[26] 서적 増上寺徳川将軍墓とその遺品・遺体 東京大学出版会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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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서적 「豊臣大名」真田一族 洋泉社 2016
[31] 서적 遊びをする将軍 踊る大名 教育出版 2002
[32] 서적 江戸城の宮廷政治 熊本藩細川忠興・忠利父子の往復書状 講談社 2004
[33] 서적 名将言行録
[34] 서적 徳川将軍家十五代のカルテ 新潮社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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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서적 日本刀大百科事典 雄山閣
[37] 웹사이트 同性愛の研究 https://dl.ndl.go.jp[...] 人生創造社 1931-12-05
[38] 뉴스 将軍の肖像画、下絵はリアル 徳川宗家に伝来、研究進む http://www.asahi.com[...] 2012-08-08
[39] 블로그 鶴は千年、亀は萬年。 http://blog.goo.ne.j[...] 2012-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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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간행물 征夷大将軍・系譜総覧 1979-06
[45] 서적 言経卿記 1611-09-21
[46] 문서 没後に側室の扱いを受ける。
[47] 문서 養父である秀忠の菩提を弔うため寛永2年(1625年)に、本妙寺(現:京都府宮津市)を開創している。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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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서적 일본에 상륙한 기독교:일본인들의 비상한 문화적응능력 사계절
[54] 문서 이 때, 우에다 성의 수비군 사령관은 사나다 마사유키와 그의 차남 사나다 유키무라(真田幸村; 사나다 노부시게(真田信繁))였고, 히데타다의 부관은 사나다 마사유키의 장남 사나다 노부유키와 도쿠가와 사천왕의 한 사람인 사카키바라 야스마사였다.
[55] 문서 겐지 일족의 종주에 대한 호칭. 아시카가 바쿠후 이래로 대대로 쇼군들이 물려받던 지위로 겐지의 대표자를 자처하였던 역대 쇼군들에게는 정통성의 상징이었다.
[56] 서적 겐지와 일본국왕(源氏と日本国王)
[57] 서적 일본의 이중 권력, 쇼군과 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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